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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과 사회로의 복귀가 꿈 (1998.10.17. 연세대학교 행정춘추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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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선미 작성일06-02-08 11:32 조회2,4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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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 10. 17 / 연세대학교 행정춘추 

      가정과 사회로의 복귀가 꿈

  “자유, 모험, 미래, 희망…”.

배를 타고 육지를 떠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단어를 연상케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부풀게 한다. 
물론 육지사람들과 달리 섬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일 것이다. 
배를 타고 육지고 간다는 것은
“사랑, 정착, 평화, 안정”을 의미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천항 주변의 대형지도를 보니, 이름도 낯선 섬들이 옹기종기 강화도와 영종도 주변에 모여있었다.  영종도와 강화도 중간에 위치한 장봉도, 그 곳이 우리의 목적지인 장봉혜림원이 있는 곳이다. 

1학기생의 마지막 행사를 장애인 친구들을 만나는 것으로 뜻깊게 장식한 것은 무엇보다도 임성만 장봉혜림원 원장의 초청이 있었기 때문이고, 공휴일을 반납하면서 까지 먼 길을 떠나기로 한 원우들의 멋진 선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이영휘, 김주한, 이용욱 원우들이 선뜻 20만원씩 기부금을 아끼지 않았고, 권용자, 신성현, 심복자, 이기정, 최두열씨 등 11명과 4학기 황인성, 그리고 총원우회 회장으로 당선된 이재민씨 등 행정대학원 13명과 가족 등 21명이 장봉혜림원의 방문객이 됐다.

7월 17일 월미도→영종도→장봉도로 예정돼 있는 우리의 여정은 아침 9시 30분 월미도 여객선 터미널에서 시작됐다.  장봉혜림원에서 나온 직원의 안내로 영종도행 배에 몸을 실었지만 4명이 미처 배를 타지 못해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영종도 삼목, 장봉도행 배를 타는 곳에서 극적인 상봉, 결국 이 사건은 ‘1학기생들의 하나됨’을 확인시켰고, 부등켜 얼싸안는 우리들 가슴가슴에 깊이깊이 새겨졌다.

월미도에서 10분 동안 배를 타고 영종도에 도착하니, 어수선한 모습이 영종도의 이미지를 흐린다.  ‘공항터미널 공사중이니 그럴 수밖에…’ 하고 이해하면서도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진 영종도의 건설현장을 관광지화하지 못하는 안이한 우리나라 관광행정이 안타깝다.  수도권의 젊은이들만이 아슬아슬한 옷차림으로 자연을 즐기는지, 자신을 즐기는지 먹고, 마시고, 버리는 관광이 펼쳐지고, 이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 졌다.

장봉혜림원에서 나온 총무과장 이한형씨와 인사를 나누고, 봉고와 버스에 나누어 타고 영종도 반대 끝 쪽 삼목으로 향했다.  한 40여분쯤 버스로 달리면 장봉도행 배를 탈 수 있는 삼목에 도달한다.  거기서 다시 40분간 배를 타고 가야 장봉도에 도착한다.  40여분간 봉고를 타고 가면서 마음 속으로는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는 기분을 내보았다.  초행지라 그런 기분이 날 듯했지만, 이내 흉측하게 벗겨지고 있는 산과 내팽겨진 염전 등 과거 이곳 사람들의 생활터전이 사라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꿈을 펼칠 수가 없었다. 

삼목에 도착하니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1백 명 탈 정도의 배이려니 했더니 웬걸 월미도-영종도간을 오가는 배만큼은 아니지만, 자동차가 30여대 훨씬 넘게 탈 수 있는 거대한 배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장봉혜림원을 찾아오는 봉사자가 연간 7천명이라고 하니, 이 정도의 배가 운행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분간 바다 내음과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다들 ‘일상에서의 탈출’을 기뻐하고 있었다.

드디어 12시 장봉도 도착, 

마중 나온 봉고에 모두들 탑승, 5분여 가니까 혜림원이 보였다.  산자락에 2층짜리 단아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 주민들과도 사이가 좋은 듯 서로 인사하는 모습에서 장봉혜림원이 도시에 있는 다른 장애인복지시설과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장애인 친구들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평온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정신지체인’ : 선천적, 후천적으로 정신발육이 지체되어 지적 능력의 발달이 불충분하거나 불완전하며,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것과 사회생활의 적응이 현저히 곤란한 사람들‘정신연령이 낮아 성인이 되어서도 어른아이인 상태’

그러나 천진난만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제일 먼저 안내된 곳은 교회로 사용되는 건물이었다.  시골교회를 연상시켰지만, 대형 텔레비전과 에어컨을 보니 이 장봉혜림원을 찾아오는 손님의 첫 관문임을 알 수 있었다.  시원한 주스를 따라주는 자원봉사자들 한신대, 아주대 등 사회복지과 학생들이 2주일씩 봉사하고 이었다.

「장봉혜림재활원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섬에서 온 편지」등 안내 팜플렛을 받고 혜림원 임성만 원장의 소개가 있었다.  장봉혜림원의 운영조직은 관리부(총무, 경리, 회계, 시설관리, 차량관리, 급식 등)와 재활사업부(행사, 상담운영, 생활지도, 의료재활, 직업재활, 그룹 홈), 지원사업부(후원자 개발관리, 자원봉사자 개발관리, 전산)로 구성돼 1백여명의 성인 정신지체 장애원생들의 재활을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지난 7월부터 재활원과 요양원으로 분리, 운영하게 돼 13면이나 더 많은 선생님의 도움을 받게 됐다고 한다.

1백명의 장애인에 선생님이 35분 계시니 행복하겠다 싶었지만, 임 원장은 그래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단다.

장봉혜림원은 장애인의 사회통합, 사회복귀가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95년부터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의 사회복귀를 실천, 부천과 인천에 그룹 홈(장애인 공동가정)을 마련, 현재 여섯 가정이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장봉혜림재활원에서도 그룹 홈 입주를 준비하는 ‘프레 그룹 홈(Pre-Group Home)' 즉, 준비 가정생활을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준비가 한창이라며 건물개조와 교회건축 등을 하느라 자신과 직원들을 ’노가다‘로 비유했다.  30분 정도 장봉혜림원의 운영방향과 목표를 소개받은 후 작은 성의이지만, 성금과 빵을 전달하고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 안에는 한두 명 정도만 식사 중이었고, 다들 점심을 먹은 뒤였다.  스테인레스 식판에다 밥, 김치, 달걀찜, 생선찜, 국을 담았다.  장애인들은 거리낌 없이 우리에게 와서 어깨나 등에 손을 얹고, 악수를 청하고, 웃음을 보냈다.  대개 첫 질문이 ‘언제 갈 거야’였다.  ‘4시에’라고 말하면서 ‘모두들 훌쩍 왔다 훌쩍 가니까 그러는 구나’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룹 홈으로 가는 것이 이들의 희망이기 때문에 ‘간다’는 말을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밥은 꿀맛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이 회와 상추, 깻잎, 초고추장, 과일 등을 날랐다.  식탁이 넘쳐나도록 푸짐한 점심이었다.  신성현씨 장남(중3)은 다 먹은 식판을 나르기도 했다.  배움의 현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각 시설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고선정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소개로 가장 중증장애인들의 방을 둘러보게 되었다. 식당이 있는 중앙건물 1층, 식사하기 편하게 중증장애인들이 이 건물 1층과 2층에 살고 있었다.  1가정에 10여명이 있으며, 각 가정에는 ‘가장’도 1명씩 있었다.

방 서너개(방마다 화장실이 딸려있다)와 거실, 그리고 보육사 방이 있다.  보육사와 장애인들이 한방에서 함께 기거하면 보육사와 장애인들 서로에게 스트레스가 된다며, 보육사의 독립적인 방이 꼭 있다고 설명한다.  화장실은 세수와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넓었다.  깨끗한 벽지, 장롱, 커튼 등이 일반 가정집을 연상케 했다.  거실에는 우리의 역할이라면서‘신발장 정돈하기’ 창문턱 먼지 털기‘ ’유리창 닦기‘ 등이 적혀 있고 평가로 ○△X로 표시를 해두었다.

2층도 마차가지 구조였다.  다만 옆에 샤워장 시설이 목욕탕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로 똑같았다.  옷을 벗어 넣어두는 곳도 문이 없을 따름이지, 똑같았다.  일종의 사회연습의 하나였고, 사회복귀를 목적으로 한 이런 배려는 시설 구석구석에서 엿볼 수 있었다.  벽지나 복도의 페인트, 커튼 등은 밝은 색으로 해 어디에도 칙칙한 느낌이 들지 않았고, 집단시설들이라는 인식이 들지 않았다.

식당이 있는 중앙건물 오른쪽에는 직업훈련건물과 사슴방목장이 있었다.  사슴방목장은 예날에 있던 직원이 1쌍을 기증한 것이 식구 수를 불려 현재 10마리라고 한다.  2명의 장애인이 돌보고 있다고 한다.  사슴은 그때그때 싱싱한 풀을 먹기 때문에 이들의 책임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만 했다.

직업훈련건물 입구에는 노래방이 있어 가장 즐겨 찾는 곳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노래는 가요를 좋아한다고 했고, 이들은 글을 읽을 줄 몰라도 암기력이 뛰어난 선생님들보다 더 최신곡들을 잘 알고 좋아한다고 했다.  건물로 들어서자 왼쪽에 축구공이 놓여있어 축구부 특별활동 운영이 잘 되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화장실과 라운지도 편안하게 보였다.  오른쪽에는 미용시설이 있는 넓은 거실을 포함, 집단 특별활동을 운영할 수 있는 방들이 서너개 있었다.  축구부, 핸드 벨 연주단, 신앙지도 등 특별활동을 운영하는 곳이다.  자원봉사자들이 많을 경우 이곳을 숙소로 이용하기도 한단다.

사슴농장 아래로 내려오면 프레 그룹 홈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 서너채가있다.  벌써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중증장애인들이 기거하는 곳과는 달랐다.  이쁜 이층집을 들어가는 현관에는 ‘시티 오브 조이’영화 판넬이 달려있고, 화분이 놓여있고, 이층계단이 아이보리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미끄러지지 않도록 계단 끝마다 미끄럼 방지탭이 붙여져 있었다.  한 장애인이 TV를 보느라 누워있는 친구를 향해 “손님이 왔는데 누워있냐”며 가르침을 주니 얼른 일어난다.  일종의 생활교육의 한 장면이다.  서로가 그때그때 지적하는 모습도 보기좋았다.

또 다른 방에는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니까 ‘굿모닝’한다.  책 옆에 놓여있는 노트에는 영어단어를 열심히 옮겨 적으면서 외우려는 흔적이 역역했다.  그러나 알아볼 수 있는 영어단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작은 화분이 거실을 아담하게 꾸미고 있었다.  이 화분들도 장애인들이 다 알아서 키운다고 한다.  중증장애인 숙소하고는 달리 이곳에서는 자기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고, 다른 친구들이 제대로 했는지 서로 체크하고 비판도 한다고 한다.  물론 프레 그룹 홈에는 상주하는 직원이 딸려있지 않다.  각자 규율을 정하고, 서로 체크하고, 자기 생활공간과 공동 생활공간과 공동 생활공간을 적절히 활용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아직 싱크대를 달지 않았지만, 커피는 손수 끓여먹을 수 있도록 설비돼 있었다.  이 곳에서는 일상생활의 기능을 익히고, 체험하는 곳이라 서인지, 식판을 가지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가정요 식기와 세탁기 등을 사용하면서 이 건물 안에서 식사와 생활을 모두 한다.

옆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세 팀 정도 운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여자들의 숙소에는 한결 여성스러움이 있었다.  꽃이 놓여 있고, 커튼 색깔이나 판넬들이 더 화려했다.  세탁도 직접 하는데,, 깔끔하게 빨은 것은 물론 얌전하게 절려있었다.  정신지체아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여자들의 옷은 밖이 아니라 부엌이나 방에 빨래걸이를 갖다 놓고 있었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속옷에 호기심을 많이 갖고있기 때문에 밖에다 널지 못한다고 한다.  성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느냐고 물었더니, 성교육도 진행한다면서 마스터베이션 등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되도록 다양한 활동과 일을 주어 관심을 다른 데로 유도한다고 말한다.

여자숙소 옆에는 물리치료, 체력단련장과 치과․내과 등 의료재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치과 치료를 위한 의료기재도 준비돼 있었으며, 한 달에 한번씩 의사들이 온다고 한다.  이층에는 사회 적응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전문적인 특수교육장이 있는데, 요한, 다윗, 빌립반 등 능력별로 3개의 반으로 나뉘어져 있고, 직업지도반이 있다.  정신지체인들이기 때문에 사회직업으로 복귀하는 것은 어렵고 생활지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벽에는 수저 사용법, 이 바르게 닦기 등 그림이 붙어있었다.  농업지도가 훨씬 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벼농사, 밭농사를 하며, 정서적으로도 쉽게 적응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집으로, 사회로 나가려는 ‘꿈’이 깨어지지 않도록 사회도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하는데, 과연 이들처럼 준비를 하고 있나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해 진다.

1백명 장애인들이 기거하는 곳에는 프레 그룹 홈(3개 정도 운영 예정이라고 한다.)이 아니더라도 모든 숙소마다 이름이 있었다.  인기네집, 자순이네집, 등 문패도 있었다.  1호실, 2호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감옥에서는 이름이 없고, 번호로 불리 운다.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느 사람들마다 다들 이름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무패를 가르키며 자꾸 보여주는 청년도 있었다.  ‘그래, 나처럼 너도 이름이 있구나’ ‘그래 우린 똑같지’ 가슴이 미어진다. 

화단에도 이름이 붙은 푯말이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름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듯이 자기가 키운 꽃과 나무를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우고 있었다.  특히 인기네 집은 문패를 식구들 사진으로 예쁘게 장식하고 있었다.  사진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음이 분명했다.  방에도 사진이 많았다.

피아노가 있는 방이 있었다.  고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한 친구가 피아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능력개발면에서 갖다놓았다고 한다.  ‘능력이 있는지를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니 보육사나 자원봉사자들이 찾아내기도 하지만, 방문한 손님이 발견하기도 한다며 발견하면 즉시 개발 차원에서 보조를 해준다고 한다.  컴퓨터에 관심이 있는 장애인도 한사람 있다고 한다.

지능은 3~7세 정도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불쌍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피아노를 그린 그림을 보여주면서 손으로 치는 시늉을 하는 소녀도 있었다.  소리에 관심이 많았다.  모두들 티 없이 맑았다.  우리 방문자들도 그들과 잘 어루어졌다.

버섯 재배하는 곳도 들렸다.  2명의 청년들이 물을 주며 키우고 있고, 버섯 딸 때나 씨를 심을 때만 모두들 함께 한단다. 자기역할을 나누고, 성실히 이를 행하고, 그리고 그룹 홈으로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들의 꿈은 ‘가정과 사회로의 복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 돌아보고 나서 중앙건물 옆에 있는 큰 나무 밑에 사각형의 탁자에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기업으로부터의 고액성금에 의존하기 보다는, 1천원 구좌라도 작지만 많은 사람들의 후원에 관심을 둔다는 임 원장의 얘기와 우리의 궁금증, 그리고 소감들이 오고갔다. 

그룹 홈으로 나가서 운영되고있는 성희네 집, 윤기네 집, 태영이네 집, 준용이네 집 등은 주위 이웃들과 각별하게 살고 있단다.  아파트로 이주하기 한달 전에 주민들에게 이들의 상태를 미리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주민들과 어울리는 일에 적극적이어서 그런지 이제는 내쫓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지켜주고 보호해준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장애인도 하나의 인격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설 집단수용보다는 그룹 홈이 운영비도 훨씬 적게 든다고 한다.  현재 장봉혜림원의 연간 운영비는 약 7억원.  1명당 연간 7백만 원이 드는 셈이다.  물론 다른 사회적 비용을 계산하면 더 많이 들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운영비 보조는 그룹 홈의 경우, 1명당 2백 50~3백만 원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내 머릿속에는 이곳에 살고 있는 장애인과 서울역의 노숙자, 여전히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중소기업, 하청노동자, 산꼭대기 단칸방에 7~8식구가 함께 사는 빈민들의 얼굴이 오버랩 됐다.  누가 더 불행한가는 따질 필요는 없다.  각기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시작할까, 마음은 자꾸 무거워진다.

언덕에서 얘기하면서 전혀 섬으로 느껴지질 않았지만, 바다가 눈앞에 들어온다.  4시 출발에 앞서 바닷가로 가보자는 제안에 모두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장봉혜림원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다가 영종도 배를 타러 떠났다.

모두들 임 원장의 삶과 장봉혜림원에서 활동하는 보육사, 자원봉사자들의 삶에 자극을 받은 듯했다.  조금씩 우리의 삶도 달라지리라 믿으며 인천을 향해 배에 몸을 실었다.

심복자(사회복지(2)/노동자신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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