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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사회통합에 앞장서는 장봉혜림재활원 (2001. 열린지평 겨울호. 탐방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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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선미 작성일06-02-08 12:03 조회2,8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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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 / 열린 지평 / 겨울호

  장애인 사회통합에 앞장서는 장봉혜림재활원

  장봉도에는 영종도의 삼목나루터를 떠난 지 30분만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육지에서 36㎞ 떨어져 있는, 인천광역시 웅진군 북도면에 속해 있는 장봉도, 바나나처럼 긴 세로의 이 작은 섬에는 360가구 8백여 명의 주민들이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고 있다.  선착장에는 어부들이 잡았다가 놓아주었더니 많은 물고기를 보내주어 풍어를 이루게 해주었다는 인어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선착장에서 한 10분쯤 자동차를 타고 달리니 섬 끝자락에 장봉혜림재활원 나타났다.  무척 착하고 순박해 보이는 대여섯 명의 정신지체 생활인들이 먼저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이곳은 90여 명의 성인 정신지체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장애인생활시설.  첫 인상에 여느 복지시설과는 다른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복지시설이라면 거대한 시멘트 사각형 건물이 우뚝 자리를 잡고 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사람들을 내려다보건만 여기에는 오래 전 학교로 쓰이던 건물을 빼고는 이층 건물조차 없다.  만여 평의 대지에 정말 사람이 사는 곳처럼 아담한 건물이 여기저기 놓여 있고 예쁘장한 목재 주택까지 몇 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직원회의 때문에 늦게 나타난 임성만(43)원장의 첫 마디는 “생활재활교사(보육사)가 두 배로 증원돼 장애인에 대한 서비스가 너무 좋아질까 봐 고민 돼 직원들과 이야기 좀 하느라고 늦었습니다.”였다.

  어떤 시설이든 시설장이라면 생활인에 대한 서비스가 좋아지는 것을 반가워하련만 오히려 염려가 앞선다는 임 원자의 첫 마디는 예사롭지 않아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장애인은 시설이 아닌 사회에 나가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설은 장애인들이 영원히 살기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시설이 그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어서는 곤란하지요.  생활인은 사회로 돌아가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너무 잘해주면 안락함에 빠져 독립심을 키울 수 없습니다.  작년에 우리가 생활재활교사 2배수 증원 운동을 벌여 드디어 오늘부터 생활 재활교사가 두 배가되었습니다. 과연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지금 고민하고 있습니다.“

  2000년에 벌인 생활재활교사 2배수 증원운동이 벌어졌었다. 이 운동을 장봉혜림재활원의 임 원장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남 다른 관심을 끌고 있다.

  2배수 운동이란 정부가 예산 부족을 핑계로 생활재활교사 한 사람이 24시간을 계속 근무하도록 강요하는 것에 대한 생활재활교사들의 권리 찾기 운동이었다.  원장이 시설직원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는 것도 특별하지만 이 운동이 궁극적으로 정부를 겨냥한 것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직원들이 시설장에게 요구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장봉혜림재활원은 사회복지법인 백십자사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의 역사는 6,25사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양신학대학을 다니다 월남한 故 임병덕 목사는 전쟁 중 고아들의 비참한 상태를 보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한 명, 한 명 경기도 부천의 집으로 데리고 와 돌보다보니 자연스럽게 고아원이 형성되었다.  한때 많을 때는 100여 명의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으나 70년대 들어와 전쟁고아들이 성인이 되어가면서 차츰 그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때 박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여사는 전국 복지시설장들에게 장애 아동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부탁했고 이를 받아들여 76년 부천혜림원이 탄생했다.  시설을 장애인 시설로 전환한 것이다. 당시에는 버려지는 정신지체 아동들이 많아 정신지체아 시설로 설립되었다.  지금도 부천에는 혜림원과 혜림학교가 있는데 이 혜림원에서 성인들만 따로 수용하는 장봉혜림재활원이 분리된 것은 지난 85년.  처음에는 혜림원이 있는 부천에 건물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주민들의 항의가 워낙 거세 자 관할 관청이었던 부천군에서 당시 부천군에 편입되어 있던 장봉도에 입주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어 지금의 위치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임성만 원장이 원장에 취임한 것은 지난 88년이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 임병덕 이사장은 도무지 볼 수 없었던 분이다.  당시에는 정부 지원이 전무했기 때문에 후원을 받기 위해 밖으로 뛰어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고단한 고아원 일이야 언제나 어머니 지혜일(80)씨의 몫이었다. 

  그는 젊어서 한때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 연극과 시에 심취하여 창작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황은 오래 가지 않았고, 스물 세 살에 대구대 특수교육학과에 입학, 아버지의 뒤를 이를 준비를 한다.

  임 원장은 대학 졸업 후 특수교사와 혜림원에 들어가 재활교사 등을 하면서 장애인 복지에 열정을 다하지만 늘 마음 한 구석에는 근심이 있었다.  과연 시설에서 장애인들이 아무리 잘 먹고 잘 입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그들은 시설에 갇혀서 사회복지사에 의해 구제와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이런 의문은 미국의 최신 복지 이론을 접하면서 서서히 광명을 찾아가게 됐다.  특히 장애인의 삶 형태와 일상생활 조건을 가능한 한 일반적인 상황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들과 가깝게 해주어야 한다는 정상화(normalization)개념은 그의 시설운영 신념으로 굳어졌다.  그는 서둘러 격리되고 관리 당하며 살고 있는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사회로 돌려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주거환경부터 달라져야 하기에, 입소자를 관리,하기 편하게 복도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방들의 구조를 바꿔 거실과 방, 화장실, 부엌의 구조가 갖추어진 보통 가정의 형대로 개조하고, 숙소 건물도 대규모보다는 아담한 주택 규모로 건축했다.  그리고 규제와 통제, 지도 위주에서 자율 자습의 형태로 관리 원칙을 바꿔 장애인의 역량을 높여주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를 들자면 정신지체인들에게 전화를 거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보다는 전화가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자연히 전화 거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하고 직원들은 단지 환경만 조성해 주어야 합니다.”

  재활원은 사회통합을 위해 95년, 시설로는 국내 최초로 경기도 부천에 장애인 일곱 명과 지도교사 한 명을 내보내 그룹 홈을 설치하였다.  그 후 매년 한 가정씩 내보내 현재 다섯 가정에서 스물 다섯 명이 사회에 통합되어 살고 있다.  현재 그룹 홈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 독립생활에 성공한 쟁애인이 두 명 있다.

  한때 110명에 이르렀던 장봉혜림재활원 생활인의 숫자는 현재 90여명.  그룹 홈으로 나간만큼 보충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재활원 측에서는 몇 년 후에는 시설에 남기를 원하는 소수의 장애인을 빼고 모두 사회에 복귀를 시키고 현재의 재활원을 독립생활 지원기관과 연수원으로 역할을 변화시킬 예정이다.

  현재 장봉혜림재활원에 있는 정신지체인들 중 기초생활능력을 배양해야 하는 사람들은 40면인데 이들은 요양원 소속으로, 훈련을 받아 사회적응훈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재활원 소속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여섯 명 정도가 한 가정을 이루어 재활원 재 곳곳의 건물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현재 열세 가정이 있는데 요양원 소속 식구들은 하루 종일 생활교사와 함께 살면서 일상생활을 통해 교육을 받지만 재활원 식구들은 낮에는 보호작업장에 출근해 구슬공예나 버섯재배, 영농기술 등을 배우며 사회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햇빛 속에서 빨간 벽돌이 빛나고 있는 ‘재활관’이라는 건물을 방문해 보았다.  마당에 조그만 꽃밭이 있어 포근해 보이는 이곳에는 요양원 소속 한 가정과 재활원 소속 두 가정이 입주해 있다.  재활관 입구를 들어서니 마당을 가운데 두고 세 면에 각 가정의 현관이 보였다.  각 가정의 입구에는 문패가 있었다.  이 재활원에서는 보통 가정과 비슷한 분위기를 제공하려고 각 가정의 연장자 이름을 문패에 써넣는다.  ‘신정자’라는 무패가 걸려 있는 가정의 현관을 열어보았다.  20평은 훨씬 넘어 보이는 공간인데 거실에는 장애인 여섯 명과 생활교사 한 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  부엌이 달린 거실 하나에 방 두 개, 생활교사 방 하나, 목욕탕 등이 갖추어져 있어 완전히 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가정은 김종구씨 댁.  식구들이 재활원 소속이라 모두 보호작업장에 출근해 집이 비어 있었다.  30평, 널찍한 집인데 커다란 거실에 방 세 개, 화장실은 두 개나 되었다.

  부엌에는 냉장고가 있고 식기 도구가 마련되어 있는데 생활인들이 직접 음식을 조리 해 먹는다고 했다.  생활교사가 아침, 저녁으로 점검을 하러 오지만 생활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어야 하기 때문에 직접 일을 해 주는 적은 없다.

  안방의 장롱에는 각 식구들마다 각자의 공간이 있어 자기 옷을 따로 보관하고 있었다.  생활인들이 보호작업장에 출근할 때면 외출복을 입도록 하는데 사는 곳에서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직장이라는 개념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좀 까다로운 거 같지만 개인별로 정장 한 벌 이상을 갖추도록 하여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정장을 입도록 하고 있다.

  장봉혜림재활원에서 이렇게 복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회 복귀를 위해서는 ‘사회적 역할 가치화 이론’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장애인이 사회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능력도 고양시켜야 하지만 이미지도 좋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복장은 이미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재활생활교사 고은정씨는 직접 도와주지 못하고 말로 지도하고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답답할 때가 많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시설에 있는 생활인들보다는 훨씬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것 같다고 했다.  또한 사회에 나가 자유롭게 사는 그룹 홈 생활자들을 보고 더 열심히 사는 것 같다고 했다.  이들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보호작업장은 낙엽이 펼쳐진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실내에서는 장애인 열 명이 한창 구슬을 꿰어 목걸이를 만드는 구슬공예를 하고 있었다.  이 제품들은 판매도 하고 있는데 여기서 받는 3, 4만 원의 월급은 적은 금액이지만 그들은 이 돈을 쓰면서 경제활동을 배운다.

  장봉혜림재활원은 섬에 있기 때문에 불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섬이라는 조건 때문에 교통비, 통신비가 엄청나다.  또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아 후원자들이나 봉사자들도 많이 오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섬이라는 열악한 교육적, 문화적 조건 때문에 직원이 오지 않으려고 하거나 와서도 오래 있지 못한다.  도서지방이니 관청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런 불리함 속에서도 99년 보건복지부에서 실시한 전국 복지시설 평가에서 60개 평가 대상 시설 중 1위를 차지했다.

  임 원장은 지리적인 조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해내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서 시설비리 때문에 시설 운영 감독을 규제 위주로 하여서 혁신적인 시도를 해볼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 시설에는 장애인 1인당 1년 정부지원금이 800여 만원, 후원금이 200여 만원 정도 들어가고 있는데 이 돈이 거의 다 직원 월급이나 시설 개보수에 쓰이고 있다고 하면서 장애인의 사회통합이 이루어지면 이 돈이 고스란히 장애인에게 돌아가므로 장애인이나 사회에 모두 유익할 것이라고 했다. 

  장봉혜림재활원의 현재 고민은 시설이나 환경이 너무 좋아지니까 후원이 급격히 줄고 있다는 것이다.  원장과 전 직원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 재활원이 이만큼 되었는데 오히려 그런 노력의 결과 때문에 사람들의 손길이 멀어지고 있다고 임 원장은 씁씁한 웃음을 지었다.  현재 임 원장의 개인 땅을 팔아 운영비를 쓸 정도이다.

  다른 복지시설의 질시 어린 눈총 속에서도 장애인의 사회 복귀를 준비하고 실천하고 있는 장봉혜림재활원. 인천공항고속도로 덕분에 장봉도는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가 되었다.  이제 장봉혜림재활원은 외딴 섬의 외로운 시설이 아니라 사회통합의 메카가 되어 한국 장애인들의 희망의 등대가 될 것이다.

 < 윤두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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