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봉혜림원을 다녀와서...(1997. 동양기전 사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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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이선미 작성일2006-02-08 11:06 조회7,962회 댓글0건본문
□ 1997. / 동양기전 / 40~41면
장봉혜림재활원을 다녀와서....
인천 월미도에서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들어가야 하는 외진 섬 - 장봉도.
그 섬에 정신지체아 보육, 교육 및 재활원인 혜림원이 있다. 평소 장애인 재활원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을 뿐 직접적인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 이번 혜림원의 방문 취재는 그들의 일상생활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우리가 만들어 놓았다는 자책감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들을 우리들의 곁에서, 우리들 생활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머나먼 외딴섬으로 격리를 시켜야만 하는가? 혜림원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또 보면서 우리 사회의 일부 메마른 정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간 인천공장 제조부에서는 매월 정기적으로 혜림원을 방문하여 자
원봉사활동을 해 왔다. 벌써 4년째 봉사활동을 해 오고 있는데 그네들은 여자이지만 힘든 일을 마다 않고 억척스럽게 봉사활동을 한다고 한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임성만 원장과 이창재 사무국장의 얘기를 듣고, 우리 인천공장 여사원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고 내 마음이 뿌듯해졌다.
11월 16일. 오전 10시에 장봉도 혜림원에 도착했다. 인천공장 여직원들이 토요일부터 와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품질기획팀 전성순씨, 제조3팀의 남인숙씨와 방주희씨, 그리고 인알파의 박경배씨 등 7명이었다.
배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고 섬에 오는 것만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혜림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겨울철 김장독을 묻기 위한 창고의 슬라브를 올리는 콘크리트 타설작업을 하고 있었다. 남인숙씨는 가냘픈 체구에도 불구하고 삽을 들고 콘크리트를 모아 올려주고 있었다.
임성만 원장과 이창재 사무국장은 한결같이 “동양기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봉사활동을 하는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며 멀리서 후원해 주시는 분들도 고맙지만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모자라는 일손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고 감사해 했다.
지난 85년에 개원한 장봉혜림원에는 100명의 장애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100명의 장애인들이 하루 3끼 식사를 하면 설거지를 해야 하고, 이틀에 한 번 빨래를 하며, 매일 목욕을 시켜주어야 한다는데...
그러나 영양서 1명, 주방아주머니 1명, 세탁사 1명, 간호사 1명 등을 포함한 법적 직원의 정원은 20명이란다. 이러한 인원으로는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부담으로 직원을 채용하여 현재 30여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정부의 재정 지원도 부족하여 운영비의 52%정도가 보조금이고, 나머지 48%는 후원금으로 운영을 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최근에는 국내 경기의 장기 불황에 따른 여파로 후원금 마저 줄어든 형편이라 운영에 애로점이 많다고 임성만 원장은 말했다.
장봉혜림원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내부시설이 아주 깨끗했다. 양지바른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건물들, 누가 보아도 어느 연수원 같은 분위기였다. 최근에 구 건물을 헐어내고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장애인들의 생활공간을 새로이 지었다고 한다.
장애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은 내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반적인 재활원과 같은 단칸방에 여러명을 수용하는 형태가 아니라 집의 구조가 일반 가정집(빌라, 아파트)과 똑 같았다. 방 3개, 세면장 2개, 거실 1개, TV 1대씩...
임성만 원장은 100명의 장애인들을 세심히 보육, 재활하고 있다고 하지만 보육사와 관리인의 턱없는 부족으로 인하여 장애인들을 더 잘 돌봐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향후 인원이 줄어들 수 있다면 현재의 반정도로 줄여서 장애인들이 보다 세심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하루 빨리 이들을 우리들과 같은 생활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재활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봉혜림원의 원생 중 재활정도가 높은 사람들은 육지로 보내져 일반인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인천에 공동생활 5가구를 마련했다고 하면서 이창재 사무국장은 “앞으로 더 많은 장애인들이 이곳 혜림원이 아닌 육지의 도심에서 일반인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신지체인을 돕는 일은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낼 일 같았다. 웬만한 결심으론 어렵고 남다른 투철한 사명감 같은게 있어야 버텨나갈 것 같았다. 보육사들도 1-2년 정도 함께 생활하다가 그만 둘 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혜림원에 있는 원생들의 평균 연령은 32세 정도라 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4-7세 정도의 사고력을 가진 아이들과 같았다. 나이에 비해 그 만큼 때가 덜 뭍은 깨끗한 모습 그 자체였다.
만날 때마다 인사하고, 악수하고...
내가 장애인들의 방에 들어갔을 때, 한 장애인이 갑자기 내게 매달렸다. 엄청나게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겉으로 보기엔 한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렇다고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이들이 비록 나이는 들고 인상은 험상궂었지만 어린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마음 자체였기에 나도 그를 힘껏 껴안아 주었다.
돌아서 그방을 나올 때 나에게 다시 악수를 청하였고 또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내 가슴속 한 구석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여자 장애인들의 방...
7-8명 정도의 20-30대 장애인들이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가자 우르르 몰려 나왔다. 모두가 악수를 청하며 들어오란다. 나이에 비해 정신연령이 아주 낮은 그네들이었지만 손님 대접을 아주 잘 했다.
서유경... 송경희... 라고 했다.
서유경씨는 그 중에서도 가장 리더십이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 송경희씨를 보고 똑바로 앉으라고 했다. 손님이 왔는데, 또 남자가 왔는데 하면서 아주 똘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경희씨가 금새 토라져
“너와 말 안해” “나 삐졌어”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1분쯤 지나자 경희씨가 생긋이 웃으며 다시 나왔다. 화가 다 풀어졌단다.
송경희씨는 귀엽게 생겼다. 23살이라고 했다. 손님이 왔으니 노래를 부르겠단다. 일어서서는 녹색지대의 ‘사랑을 할꺼야’를 불렀다. 불명확한 발음이지만 노래를 끝까지 다 불렀다. 모두들 박수를 쳤다.
그들만의 세계는 분명히 있었다. 비록 정신지체인이지만 순진하고 근심이 없는 듯한 표정.
단지 그들의 세계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우리들이 어쩌면 그들의 눈엔 오히려 장애자로 보여지는 건 아닐까?
장봉혜림원을 나올 때 나의 발걸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건강한 내가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관심을 주지 않고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들은 우리들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번 혜림원을 다녀오면서 그래도 아직 우리 사회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음을 알았고, 그들이 있는 한 정신지체자들도 재활원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혜림원에서는 따뜻한 온정의 손길(자원봉사 및 후원금)을 기다리고 있다. 추위가 더해 가는 겨울, 우리 주위의 이웃들을 한 번 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싶거나, 후원금을 내 주실분은 서울 홍보팀(성주란, 내선 322)이나 인천 품질 기회팀(전성순, 내선 237)로 연락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기획실 홍보팀 남효석 과장>
장봉혜림재활원을 다녀와서....
인천 월미도에서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들어가야 하는 외진 섬 - 장봉도.
그 섬에 정신지체아 보육, 교육 및 재활원인 혜림원이 있다. 평소 장애인 재활원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을 뿐 직접적인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 이번 혜림원의 방문 취재는 그들의 일상생활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우리가 만들어 놓았다는 자책감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들을 우리들의 곁에서, 우리들 생활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머나먼 외딴섬으로 격리를 시켜야만 하는가? 혜림원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또 보면서 우리 사회의 일부 메마른 정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간 인천공장 제조부에서는 매월 정기적으로 혜림원을 방문하여 자
원봉사활동을 해 왔다. 벌써 4년째 봉사활동을 해 오고 있는데 그네들은 여자이지만 힘든 일을 마다 않고 억척스럽게 봉사활동을 한다고 한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임성만 원장과 이창재 사무국장의 얘기를 듣고, 우리 인천공장 여사원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고 내 마음이 뿌듯해졌다.
11월 16일. 오전 10시에 장봉도 혜림원에 도착했다. 인천공장 여직원들이 토요일부터 와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품질기획팀 전성순씨, 제조3팀의 남인숙씨와 방주희씨, 그리고 인알파의 박경배씨 등 7명이었다.
배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고 섬에 오는 것만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혜림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겨울철 김장독을 묻기 위한 창고의 슬라브를 올리는 콘크리트 타설작업을 하고 있었다. 남인숙씨는 가냘픈 체구에도 불구하고 삽을 들고 콘크리트를 모아 올려주고 있었다.
임성만 원장과 이창재 사무국장은 한결같이 “동양기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봉사활동을 하는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며 멀리서 후원해 주시는 분들도 고맙지만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모자라는 일손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고 감사해 했다.
지난 85년에 개원한 장봉혜림원에는 100명의 장애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100명의 장애인들이 하루 3끼 식사를 하면 설거지를 해야 하고, 이틀에 한 번 빨래를 하며, 매일 목욕을 시켜주어야 한다는데...
그러나 영양서 1명, 주방아주머니 1명, 세탁사 1명, 간호사 1명 등을 포함한 법적 직원의 정원은 20명이란다. 이러한 인원으로는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부담으로 직원을 채용하여 현재 30여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정부의 재정 지원도 부족하여 운영비의 52%정도가 보조금이고, 나머지 48%는 후원금으로 운영을 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최근에는 국내 경기의 장기 불황에 따른 여파로 후원금 마저 줄어든 형편이라 운영에 애로점이 많다고 임성만 원장은 말했다.
장봉혜림원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내부시설이 아주 깨끗했다. 양지바른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건물들, 누가 보아도 어느 연수원 같은 분위기였다. 최근에 구 건물을 헐어내고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장애인들의 생활공간을 새로이 지었다고 한다.
장애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은 내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반적인 재활원과 같은 단칸방에 여러명을 수용하는 형태가 아니라 집의 구조가 일반 가정집(빌라, 아파트)과 똑 같았다. 방 3개, 세면장 2개, 거실 1개, TV 1대씩...
임성만 원장은 100명의 장애인들을 세심히 보육, 재활하고 있다고 하지만 보육사와 관리인의 턱없는 부족으로 인하여 장애인들을 더 잘 돌봐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향후 인원이 줄어들 수 있다면 현재의 반정도로 줄여서 장애인들이 보다 세심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하루 빨리 이들을 우리들과 같은 생활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재활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봉혜림원의 원생 중 재활정도가 높은 사람들은 육지로 보내져 일반인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인천에 공동생활 5가구를 마련했다고 하면서 이창재 사무국장은 “앞으로 더 많은 장애인들이 이곳 혜림원이 아닌 육지의 도심에서 일반인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신지체인을 돕는 일은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낼 일 같았다. 웬만한 결심으론 어렵고 남다른 투철한 사명감 같은게 있어야 버텨나갈 것 같았다. 보육사들도 1-2년 정도 함께 생활하다가 그만 둘 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혜림원에 있는 원생들의 평균 연령은 32세 정도라 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4-7세 정도의 사고력을 가진 아이들과 같았다. 나이에 비해 그 만큼 때가 덜 뭍은 깨끗한 모습 그 자체였다.
만날 때마다 인사하고, 악수하고...
내가 장애인들의 방에 들어갔을 때, 한 장애인이 갑자기 내게 매달렸다. 엄청나게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겉으로 보기엔 한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렇다고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이들이 비록 나이는 들고 인상은 험상궂었지만 어린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마음 자체였기에 나도 그를 힘껏 껴안아 주었다.
돌아서 그방을 나올 때 나에게 다시 악수를 청하였고 또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내 가슴속 한 구석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여자 장애인들의 방...
7-8명 정도의 20-30대 장애인들이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가자 우르르 몰려 나왔다. 모두가 악수를 청하며 들어오란다. 나이에 비해 정신연령이 아주 낮은 그네들이었지만 손님 대접을 아주 잘 했다.
서유경... 송경희... 라고 했다.
서유경씨는 그 중에서도 가장 리더십이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 송경희씨를 보고 똑바로 앉으라고 했다. 손님이 왔는데, 또 남자가 왔는데 하면서 아주 똘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경희씨가 금새 토라져
“너와 말 안해” “나 삐졌어”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1분쯤 지나자 경희씨가 생긋이 웃으며 다시 나왔다. 화가 다 풀어졌단다.
송경희씨는 귀엽게 생겼다. 23살이라고 했다. 손님이 왔으니 노래를 부르겠단다. 일어서서는 녹색지대의 ‘사랑을 할꺼야’를 불렀다. 불명확한 발음이지만 노래를 끝까지 다 불렀다. 모두들 박수를 쳤다.
그들만의 세계는 분명히 있었다. 비록 정신지체인이지만 순진하고 근심이 없는 듯한 표정.
단지 그들의 세계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우리들이 어쩌면 그들의 눈엔 오히려 장애자로 보여지는 건 아닐까?
장봉혜림원을 나올 때 나의 발걸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건강한 내가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관심을 주지 않고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들은 우리들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번 혜림원을 다녀오면서 그래도 아직 우리 사회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음을 알았고, 그들이 있는 한 정신지체자들도 재활원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혜림원에서는 따뜻한 온정의 손길(자원봉사 및 후원금)을 기다리고 있다. 추위가 더해 가는 겨울, 우리 주위의 이웃들을 한 번 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싶거나, 후원금을 내 주실분은 서울 홍보팀(성주란, 내선 322)이나 인천 품질 기회팀(전성순, 내선 237)로 연락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기획실 홍보팀 남효석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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